(서평) 이방인

 

이방인를 읽고 쓰는 서평입니다.


이방인을 다시 읽었다. 2번째라는게 전혀 믿기지 않을만큼 여전히 어려웠다. 내가 이전에 썼던 서평과 인터넷의 여러 서평을 참고했더니 몇가지 주요 단어와 도움을 얻었다. 내가 주목한 단어는 ‘자살’이다. 특히 나무위키에 있던 저자 알베르 카뮈의 어록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여기서 ‘살 만한 가치’는 뫼르소가 ‘내가 나로서 있는 주관성이 지켜졌을 때’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등장인물들과 같은 공간내에 있지만, 다른 생각을 가진 이방인이다. 판사와 신부, 그리고 사람들에게 생각을 주입 당하는 것을 강렬히 저항한다.

특히 재판의 과정에서 충분히 자기를 변호하고, 감옥을 가지 않을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때 주인공의 살 만한 가치는 없어지기에 수감이라는 자살을 선택했다.

책 2-3: 신부와의 대화 중 신부: “하지만 당신이 당장 죽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죽겠지요. 그떄가되면 또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그 무서운 시련을 어떻게 견뎌 내실 겁니까?” :나는, 지금과 똑같이 그 시련을 맞겠다고 대답했다. . . .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 조차 없지 않은가? 볼때는 내가 빈손인 듯 보이지만 내게는 확신이라는게 있다. 나 자신에 대한 것,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도 있다. 내 인생과 닥쳐올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다.

무언가를 태우며 타오르는 태양은 무한한 듯 하지만 매순간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유한한 삶과도 같게 느껴졌다. 뫼르소의 주관성은 남(현재 삶 그 너머 사후를 중요시 하는 것)과는 다르다. 다가올 죽음을 인지하고 마주하기에 유한한 삶의 현실을 중요시한다.

우리는 유한하고 부조리한 삶 속에서 ‘나’를 지키며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