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2021.03.07 ~ 2021.03.12
, 2021.03.13
되게 어려운 소설이다. 사실 내 사고로는 주인공의 사고를 따라갈 수 없다. 사실 누구라도 다른 사람의 사고를 따라갈 수는 없다, ‘누구나 세상에 단 한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그만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타협하는데 있어서 여러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의 일개원으로서 사회가 정한 규칙에 따라 살고있다.
행동과 말을 하기까지 어떤 사고와 경험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최적의 대응을 한다. 하지만 아주 단순한 행동 혹은 말이 삶을 일부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mbti 같은 성격유형 검사도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생각을 조합하여 성격을 공통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몇개의 질문, 아니 몇만개의 질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사람의 성격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mbti를 보며 해당 유형에 속해있어도, ‘나는 이렇지 않은데’라고 말하듯. 볼 수 있는 것은 “일부”일 뿐이다. 누구나 자신의 눈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얼마전 교회를 독실하게 다녔던 친구가, 얘기를 하다가 교회를 이제는 가지 않는다는 것을 들었다. 어쩌다가 가지 않게 됐냐고 물어보니, 어느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어느순간 신을 강요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독실하게 다녔던 친구여서 계기도 없이 그런생각이 들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누군가를 몇개의 생각과 만난 것만으로도 남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자신만의 데이터베이스는 돌변하는 사건이 있지 않더라도, 축적된 무언가가 바뀔 수 있다. 오랫동안 보고 얘기를 나눴더라도 ‘너는 이런것 같애’라고 판단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회사를 다니면서 친구와 달리 동료분들과는 어느 경계선이 있는데, 그 경계선을 넘지도 않았으면서 판단하고, 까내리고, 멋대로 생각하는 것은 조심해야 된다. 내가 모르는 면과 지식, 경험이 있기에.
회사는 갑/을이 존재하며 철저히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로, 팀장/본부장/대표 등 여러 동료에게 나는 판단된다. 각자의 시선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 무섭다. 내가 나아가려는 가치관과 경험, 지식이 그들과 괴리감이 느껴질 때 마다 혼동스럽고, 당황스럽다. 특히나 내가 그들에게 평가되고 판단될 때,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그들의 가치가 달라 나의 능력이 절하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어떠한 사건이나 생각을 당사자의 깊은 생각과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집단이 밉기만하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도 나의 이익을 추구할 뿐.
엄마가 언제 죽었는지도 잘 모르며, 부고 다음날 아무 신경도 없이 애정을 나누는 것은 나는 전혀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거짓말은 죽어도 하지 않는 점이 멋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작품 전반적으로 나타난다. 가족, 사랑, 죽음, 종교 까지도 자신의 생각을 남들에게도 솔직하게 말한다. 순탄치는 않다. 누군가는 이해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전혀 이해못하기도 한다. 아쉽게도 판사, 변호사와 사회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쪽이다. 누구도 그가 엄마와 무슨 관계였는지 개의치 않는다. 그저 “엄마의 죽음을 무신경하게 받아들인 사회의 일원”으로서 단편적인 결과로 판단한다. 보편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사람은 이방인으로 배척되기 마련이다.